"알지 못하는 건 쓰지 말라"
얼마 전 내가 속한 직장의 부서 전체가 경제계 원로 석학인 김종인 박사와 만나 ‘한 수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1940년에 태어나 박정희 정권 때부터 군사정권과 문민정부를 가리지 않고 경제정책을 자문했고 얼마 전까지 통합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역임한 그분에 대해 약간의 선입견이 있었으나 실제 대화를 해 보니 경제 분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은 물론 수십년 간의 경험을 통해 경제정책에 대해 매우 깊은 통찰력을 지니게 된 합리적인 분이라는 걸 알게 됐다. 강모 장관 등 전현직 경제관료들이 과거 사무관 시절 뭘 했는지까지 흥미진진한 화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말씀 중 가장 와 닿았던 한 마디는 "기자가 알지 못하면 쓰질 말아야지"라는 말씀이었다. 경제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9월 위기설이니 무슨 대란이니 하는 식으로 위기를 조장하는 기사, 반대로 신문사의 특정 성향(현 정권에 친한가 적대적인가)에 맞춰 왜곡된 결론을 이끌어내는 기사 등등 언론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나 크다는 얘기다.
사실 요즘 신문을 읽다보면 아쉬울 때가 많다. 우선 이른바 ’9월 위기론’은 ‘위기’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매스미디어에 의해 증폭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월에 외화 채권 만기가 일시에 대규모로 도래하는데, 이 때 외국인들이 대거 상환해 가면 제2의 외환위기마저 도래할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시나리오가 골자다. 하지만 현재 외채의 성격을 보면 외국 은행 지점들이 외국(미국 등)과 한국의 금리 차를 노리고 매입한 것들이나 조선업체들의 선물환 등으로 대대적인 만기 상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시나리오는 터무니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2MB 정부의 경제 실정이 계속되면서 국민들이 정책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상실되고 때맞춰 외국인들도 엄청난 속도로 ‘셀 코리아’에 나서 증시를 급락시키자 ‘정말로 9월 위기설이 현실이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고조됐고, 이 같은 심리는 9월의 첫 날인 오늘 외환시장과 증시를 패닉 상태로 몰아갔다. 정부와 한국은행 등이 9월 위기설이 말이 안 된다고 계속 얘기했지만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은 국민들은 그 같은 해명조차 믿지 않는 분위기다.
‘국민연금 고갈론’로 언론의 단골 레퍼토리인데, 사실 국민연금은 애초부터 처음 일정기간은 적립을 했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납입자의 돈으로 수혜자의 연금을 내는 형식으로 전환되도록 설계가 돼 있었다. 물론 고령화 저출산 시대의 도래에 따라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들의 부담이 커질 것을 대비해 연금구조를 조정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언론에서 국민연금이 고갈될 것이라고 불안감만 조장하는 것은 국민연금을 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 늘릴 뿐이다.
신문의 성향에 맞춰 사실을 왜곡하는 기사를 쓰는 경우도 큰 문제다. OO경제, XX경제 등 경제 일간지들은 노조 때문에 회사가 망했다는 기사를 심심하면 쓴다. 조선일보도 기륭전자 관련 기사를 통해 합세했다. 연간 이익만 200억씩 내던 회사가 겨우 최저임금을 받던 30여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했다는 사실은 아예 언급도 안 하고, "노조가 ‘단식투쟁’을 하니 회사가 망하게 됐다"는 식의, 도저히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기사를 썼다. 여기에 한 명의 ‘전문 노조꾼’ 때문에 회사가 망하게 됐다는 식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해 내 놓았다.
사람들은 경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만큼 경제 기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용어의 남발이나 ‘위기’ ‘불안’만 조장하는 기사, 속시원한 설명이나 대안 없이 문제점만 나열하는 기사는 이제 그만 쓸 때가 됐다. 독자들이 가장 원하는 쉽고 깨달음을 주는 분석 기사가 가장 필요하고, 그것이 속보 경쟁에서 이미 멀리 뒤쳐진 신문사가 추구해야 할 길이다.
문제는 극소수 신문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신문사에서 그러한 분석기사를 쓸 수 있는 인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점이다. 소수 인원이 매일 여러 면을 메워야 하는 처지에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분석기사를 쓰기는 쉽지 않다. 1~2년이면 출입처가 바뀌기 때문에 전문기자를 육성하기 어려운 한국 언론사의 고질적인 문제도 여전하다. 나도 내가 쓴 기사를 자신있게 읽으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논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중요한 팩트라도 무시하고 그럴 듯하게 초를 치는 것을 당연시하는 보수언론의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좀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심층적인 기사를 쓸 수 있는 ‘주간지’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인력풀을 지닌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에 비교하면 안 되겠지만, 한국 주간지의 경영상황은 신문사보다 훨씬 열악해서 한 사람이 1주일에 쓰는 분량이 정말로 어마어마하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인터넷에도 경제 쪽 전문가는 많지 않은 듯하다. 게시판에는 경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정도의 어이없는 음모론이나 괴담이 난무하고 블로거 중 경제 전문가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정년으로 교단이나 금융계를 떠난 경제 원로들이라든지 학계나 민간 연구소 등의 전문가들이 블로그를 시작해 좋은 글을 써 주면 어떨까. 봉사나 사회공헌의 차원에서라도 말이다.

경제 분야는 특히 신경 써주면 좋겠습니다. 독자들의 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뿐이지, 지식이 높아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터지지 않은 (올 지 안 올지도 확실하지 않은) 위기를 예고하면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위기가 터지는 줄 (혹은 이미 터진 줄) 알게 되지요. 패션 업계가 여름이 되기도 전에 올 여름 유행은 뭐가 될거다 라고 예고하듯 고정시켜버리면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따라가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게시판에는 경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정도의 어이없는 음모론이나 괴담이 난무하고”
뜨끔!
“금융계를 떠난 경제 원로들이라든지 학계나 민간 연구소 등의 전문가들이 블로그를 시작해 좋은 글을 써 주면”
공감만빵!
:)
모르면 닥치고 짜져있으라(…)
했던 비선생이 떠오르누만요.
양치기 중년…
위기란다. 9월에 뭔가 터지고야 말 거란다. 흉흉한 소문이 맴돈다. 하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고. 믿고 싶다. 얼굴 마담이 바뀌었다 한들 그 밑에서 실제로 일하는…
foog님도 있고, 펄님도 있고,
그리고 이정환씨도 있고요. ㅎ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1208.html
위 글은 정말 읽을만하다능.. (물론 읽으셨겠지만.. )
polarnara // 경제기사는 아직도 많이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은 상황에서 상당수 독자들이 ‘제목’만 보고 내용을 판단하기 일쑤인데 제목에 ‘위기’ ‘위기’를 남발하면 공포분위기를 조성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foog // foog님이 뜨끔하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능… ^^
히치하이커 // 헉, 비 선생이 그런 명언을 했나요? :)
민노씨 // 아직도 경제 분야 블로거의 절대적인 수가 너무 적은 듯합니다. 이정환님 글은 물론 읽었습니다. :)
음, 제가 요즘 병이 다시도져 잠시 은둔을 한 사이에 글이 올라와 있었군요. 좀 몸이 회복이 된 후에, 예전에 약속된 경제계의 지인들에게 관련된 평론을 요청할까 합니다. (요즘 다들 돈버는데 바빠서리…)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요즘 “미네르바”님 사건만 보더라도, 극사실주의에 입각한 정리된 자료를 올려도 ‘구속을 하네 마네~’라며 정부가 겁을 주는 세상이라 예민하게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김종인 박사는 예전에 노태우정권 때, 재벌들의 국가권력에 도전을 예측하고 몇가지 법안을 상정한 분으로 어렴풋이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얼마전 한 기업의 헌법소원을 할 때, 그의 식견에 많은 사람들이 탄복을 했었죠. 당시 헌법 제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만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동화은행 사건으로 03정권 때 구속만 되지 않았어도 깨끗하게 이름을 남길 수 있던 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