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 믿음의 또다른 길

Jul 10th, 2008 | By 가즈랑
사진출처 : SBS 홈페이지

사진출처 : SBS 홈페이지

# 한기총 vs SBS 다큐멘터리
얼마전에 SBS에서 방송을 했던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종교 다큐멘터리가 화제다. 4회분으로 제작되었고 현재 2회분이 방송을 탔지만, 나머지 2회분은 한기총과 같은 기독교단체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있는 실정이다. 왜 예수를 소재로 다루고 있는 종교 다큐멘터리가 오히려 ‘예수를 믿는 이들’에 의해 환영받지 못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들여다보면 분명해진다. ‘신의 길, 인간의 길’ 다큐는 이제까지의 무조건적인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서 한단계 내려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본격적으로(어쩌면 공중파에서는 처음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예수는 예수가 아닌가? 왜 그러한 논의 자체를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닫아버리고 있는걸까. 종교적 믿음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는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이글에서는 종교간의 대화와 화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지만 그리스도교가 가진 타종교에 대한 이해는 생각보다 넓다. 문헌 우리시대(Nostra Aetate)에 타종교 이해에 대한 선언이 담겨 있다. via dalcrose의 me2day)

# 신자의 고백
태어날 때부터 신앙을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많은 시간을 종교(천주교)의 테두리에 안에서 자랐고 또 그것이 내게 가르쳐준 삶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소중함 그 이상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는, 신자라면 한번쯤 해봄직한 의문들이 늘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정말 예수는 물 위를 걸었을까? 빵과 물고기로 5천명을 먹였을까? 정말 병자들을 치료하고 스스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까? 등등 주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능력에 관한 부분들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러한 기적을 의심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서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인 ‘거짓말하지 말라’- 이 규율을 스스로 배반하는 일을 설마 신부님과 성서가 할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성서의 진정성에 대해서 의심의 영역으로 넘어서는 순간은 신자에겐 무척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완전무결성을 담보한다는 성서를, 만약 한 구절을 믿지 못하게 되면 전체의 이야기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성서가 자초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신자들 사이에서 털어놓는 것은 ‘낙인을 찍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성서의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가감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지금까지의 종교교육에 따른다면 말이다.

#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는 기독교단체의 항의에 대한 SBS 제작진의 입장 가운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직까지는 학계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던 이야기들이다. 역사가들이 역사 기록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선입견과 주관을 버리고 접근하듯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도 이같은 엄격한 고증의 잣대를 성서에 들이대고 있다. 또한 종교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의 문화·생활사를 연구하는 이들까지 학제적 연구를 수행해 실재 존재했던 예수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려는 것이다.

연구 방향이 이렇다 보니, 역사적 예수에 관한 기술에는 ‘기적’이 등장하지 않는다. 신이 아닌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나자렛 예수,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겐 충격적이라 할 전복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인간적 예수’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그를 위해 서술된 여러 복음서들의 기적들은 당시 구세주로 여겨졌던 예수의 신성한 탄생의 기원과 고귀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서술한다.(특히 John D.Crossan의 입장) 따라서 연구 내용의 상당부분이 성서에 기록된 기적보다는 직접 말한 것으로 여겨지는 대화에 담긴 내용의 역동성과 가치에 주목한다. 따라서 성서를 비유적인 수사가 많이 담긴 문학적인 서술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연구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 대단히 종교적인 불신자(책의 목차에서 인용)

나는 지극히 종교적인 불신자다. 이것은 다소 새로운 종류의 종교다. ··· 우리는 자연을 매우 불완전하게만 이해할 수 있고, 이는 생각하는 인간이 겸손으로 채워야 하는 장엄한 구조다. 그것은 신비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진정으로 종교적인 감정이다.
- ‘만들어진 신’(R.도킨스)에서 인용. 아인슈타인의 대화

신적인 능력을 지닌 예수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예수로 서술된 역사적 예수연구에 지지를 보낸다면 그는 종교인일까 불신자일까. 내세와 부활에 대한 내용에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예수가 행한 신분계층에 따른 차별없이 사랑을 강조한 실천의 모습에 감동한다면..그를 종교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때로 나는 종교인으로서 종교를 지키고 싶은 마음과 사실을 알고 싶은 생각 사이에서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인간적 모습의 예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더욱 종교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인간이 된 거 같다. 성서에 나온 기적의 이야기를 사실이 아니라고 여기며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그것들이 하나의 문학적 비유로 이해되면서 더 깊은 성서의 의미를 읽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행했던 병 치료의 기적 또한 현대의 의학 개념에서 보는 ‘치료(cure)’가 아니라, 극빈층에서조차 소외받던 부류의 사람들을 한 밥상으로 끌어안은 공동체 차원의 ‘치유(healing)’에 가깝다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런 이해의 바탕에는 예수의 신성(divinity)에 대한 어느정도의 물러섬이 필요하기도 하다.

나는 예수가 곧 신(또는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신에 가까운 품성을 지녔기에 믿는다. 이때의 믿음은 나를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이라기보다는 그의 입을 통해 세상에 나온 보편적 진리가, 여전히 현대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또한 천국은 언젠가 하늘이 쪼개지고 천사들이 내려오늘 날 보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곳이 ‘하늘나라’라는 인식이 절실하다는 믿음이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보면서 믿음을 공고히 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예수가 말하려고 했던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언술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또 그런 입장에 서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진지한 성격의 신자들이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9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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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학 (증명, 증거, 합리)과 종교 (신념, 근본, 사상)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상에 매여 혹은 말 꼬투리 하나하나에 매여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고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종교 근본주의자들도, 과학의 이름으로 종교에 흠집을 내는 사람들도, 종교의 이름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자들도 너무나 많은 세상이라 생각해요.

  2. 절대적으로 공감이 되는 부분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는 글이네요..
    아, 참고로 저도 카톨릭 신자입니다..

    글 잘 봤습니다..

  3. 써머즈 // 종교와 과학은 서로의 영역을 간섭할 때 많은 갈등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는 과학적 방법으로 종교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현실속 예수의 모습, 특히 예수의 메시지들을 왜곡없이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구세주로 묘사된 복음서의 많은 겉껍질들을 벗겨내고 말이죠. 이를테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염원과 희망을 살리고 싶던 동시대인들의 간절함이 표현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역사적 예수 연구의 접근방식이니까요.

    NooGie // 네, 그 논평에 담긴 뜻을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변 친구들과 나눠보면,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많이 보이고 저또한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인가에 대해 고민을 여전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적과 여러 문학적 비유들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눈을 질끈 감았던 예전보다는, 이제야 예수의 메세지들을 진지하게 더 잘 이해할 수 있있다고 느낍니다.

  4. ‘외부로부터 구원의 종교’와 ‘내부로부터의 구원의 종교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 교단들도 내부로부터의 잠자는 마음을 깨우고 좀더 보편타당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듧니다. 어쩌면 원시성경에서 생각해봐야할 많은 내용들이 로마의 황제들에 의해 구약과 신약에서 누락이되고 여러 번 이종의 언어로의 번역이 되는 과정에서 오역과 몰이해가 발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5. 종교적 인물에 대한 해석의 시점은 다양하고, 다루는 사람에 따라 그 인물이 가지는 가치도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예수를 역사적으로 조명한 다큐멘터리라면 당연히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일텐데 – 기적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역사적이지만 우선은 종교적 기록인 성서에 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 기독교 단체들에서 항의를 한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저는 소위 말하는 교인입니다 ^^)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것이 감상 포인트…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 ‘동시에 갖추었음’이 관건인데 일부에서는 한 가지만을 너무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저는 가즈랑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이 저는 기적을 믿는 사람들도 필수 갖추어야 하는 믿음이라 생각하고, 분명 믿음의 길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믿어라, 혹은 내세를 위해서, 라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예수가 했던 것처럼. 말씀하신 cure와 healing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이것 또한 저는 한쪽만 불균형하게 강조되었다 생각해요. 기적의 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말씀하신 healing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하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우 잘 읽었습니다. :)

  6. Stanford대학의 Thomas Sheehan교수가 Historical Jesus 라는 강의를 개설한게 있는데, iTunes에 모두 mp3로 올라와 있습니다.
    iTunes에 들어가셔서 Thomas Sheehan을 검색하시면 그 강의들을 모두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블로그계의 리뷰 한 개를 추천합니다.

    http://evangelicalatheist.com/2008/02/18/historicity-of-jesus/

  7. 사도신경의 내용을 믿어야 천주교신자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밑줄 부분에서 고개를 깊이 숙인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진정한 쇄신은 외부적인 요소의 주입이나 외부적인 잣대에 의한 해체와 복원작업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파괴이지요.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새로워지고,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정반합의 논리로서 새로운 것을 추구해간다는 것은 인문학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에까지 그 칼을 들이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역사의 주기성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견지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했던 것은 율법주의의 극복이지 교회전승의 파괴나 새로운 해석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4, 48)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요한 5, 43)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5, 34)

  8. 그러니까! 차이가 많죠! 설득과 선포에는 차이가 많죠. 때로는 설득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말씀은 선포이죠. 설득을 원하는 사람이 좀더 하나님앞에 낮아질때 까지… 안타까운 하나님의 심정을 해아려 볼수 있을 정도만 된다면 …좋으련만..

  9. 그러니까! 차이가 많죠! 설득과 선포에는 차이가 많죠. 때로는 설득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말씀은 선포이죠. 설득을 원하는 사람이 좀더 하나님앞에 낮아질때 까지… 안타까운 하나님의 심정을 해아려 볼수 있을 정도만 된다면 …좋으련만.. 설득은 선포의 말씀으로 가는 중간 과정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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