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사제(師弟) 카르텔’ 논쟁으로부터의 단상
우리 사회에서 좁은 의미의 내부 고발자를 포함하여,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내부 비판자를 대체로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내부 비판행위가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노골적으로 금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하겠지만 그건 예외적인 일이라 할 것이므로 결국은 내부 비판자는 이질적 존재, 내부 비판행위는 금기 행위라는 게 원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인간 일반의 상식적인 양심까지 끌어들일 것도 없이, 그것이 현상에 대한 왜곡이며 세계관의 전도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전의 정의(定意)가 지시하는 정의(正義)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버린 사회, 선악을 판단할 정신적 능력은 가졌으되 현실적 실천을 하는 데는 지극히 게으른 사회, 나아가 내심의 양심적 판단에 따른 행동은 대개 개인적 불이익으로 돌아오리라는 계산을 용렬하게 해내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정상적인 사회이며 거기 뿌리 내리고 양분을 취하는 이들의 삶은 대체 얼마나 건강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사회 어떤 세계에 소속된 사람들을 모아 토론을 한다고 치자. 패널은 그 세계를 대표할 만한 옹호론자와 비판론자를 공평하게 선정해 구성한다[각주:1]. 토론의 주제는 그 바닥에서 무엇이 가장 썩어빠졌나 혹은 더 썩어빠졌나. 이런 주제를 끝장 토론으로 하자면 아마 지구가 쪼개질 때까지도 순위 정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사실 토론이라는 건 명쾌한 합일점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상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이기도 하므로 대화 그 자체로 족하다고 자위하기로 하자.
추측컨대, 옹호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비판론자들은 ‘그러므로/그렇기 때문에’라는 말을 가장 많이 구사할 것이지만 일정 수준까지는 순조로운 분위기에서 토론이 진행될 것이다. 그 ‘일정 수준’이라는 건 특히 옹호론자들의 입장에 대해 비판론자들이 갖는 이 사회 특유의 ‘인간적 배려’를 달리 이르는 말이지만, 어쨌든 그러는 동안에는 옹호론자들의 입에서도 제법 자아비판적이고 자각적인 발언이 나오기도 할 것이며 비판론자들의 입에서도 역사적 개연성, 내재적 필연성을 인정해 주는 발언이 나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비판론자들 가운데 누군가 그 바닥의 ‘생태 한계선’을 벗어나는 발언을 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분위기는 급전직하할 것이다. 가령, 그게 그 바닥의 ‘뿌리’를 잡아 흔들 만한 파괴력을 가진 발언이라면 그게 아무리 기정 사실에 바탕을 둔 정당한 것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시야를 좁혀 문학계를 예로 들어보면 이른바 ‘사제(師弟) 카르텔 사건’이 그 맥락에 닿아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이런 문제 제기가 이제는 기껏 ‘그래서 뭐?’라는 냉소적인 반응만 불러올 수도 있을 법하지만, 대단히 상징적이어서 거듭 반추해 보아도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사건 하나가 문학계를 뒤흔든 건 2000년 늦은 여름.
나름대로 오랜 수련을 끝내고 이제 막 문학비평의 길에 들어선 ‘생초짜’ 평론가가 그 바닥에서 자칭/타칭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찬사와 함께 감히 넘볼 수 없는 나와바리를 구축하고 있던 ‘본좌들’ 및 그 추종자들의 심기를 건드린다. 평지(도 아니다, 사실)에 풍파를 일으킨 이는 당시 서울시립대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젊은 평론가 이명원, 그 풍파에 옷깃을 여민 이들은 한국 문단계의 내로라 하는 거목들인 고(故) 김현, 김윤식, 백낙청, 고 임화.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문학계의 도그마라 할 수 있는 김윤식 비판이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킨 건 지금까지 금기로 여겨지던 한국 문학계의 아버지뻘 되는 이의 컴플렉스를 건들었기 때문이지 싶다. 아니, 담백하게 말해, 그렇다. 아버지를 건든 것도 괘씸한데 감히 아버지가 감추고 싶어하고 그 아들들도 끝까지 묻어두고 싶던 것을 끄집어내 들어매치다니[각주:2].
그들에게 중요한 건 역사적 진실이나 학자로서의 양심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상징이 갖고 있는 허물을 누군가가 드러냈다는 행위 그 자체일 뿐이다. 그 허물이 보통 허물인가. 어쩌면 오랫동안 김윤식 등을 주축으로 형성해 온 한국 문학계, 더 크게는 학계 일반의 근저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그 바닥의 생태 한계선인 것이다. 그때 그들이 품위고 교양이고 다 팽개치고 동원한 것이 ‘어디서 감히’라는 말로 대별되는 ‘가부장제적 폭력’이다.
이명원에 대한 문학계의 집단적 신경증은 그가 비단 김윤식의 저서 <한국 근대 소설사 연구>에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일부가 표절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서만은 아니었다. 만일 그의 죄(?)가 그뿐이었다면, 달리 말해 그가 문학계 종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핍박을 받은 끝에 타의에 따라 다니던 대학원을 중도에 그만둬야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바닥에서 이명원을 더 괘씸하게 여긴 이유는 한 마디로 ‘한솥밥 먹는 인간’이 그랬다는 데 있다. 한국 사회만큼 ‘우리끼리 왜 이래?’라는 말이나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 데도 또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특히 그런 데 취약한 이유는 근대적 물질문명과 사회제도를 수용하던 시기에 근대적 합리성에 기반한 인간 관계를 형성할 이성적 능력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람에 여전히 봉건적이고 가부장제적 인습이 남아 있는 탓이 크다. 더하여, 짧지 않은 시간을 식민 지배 아래서 살다 그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군사독재 치하까지 견디며 살아내야 했던 세월 동안 무의식 안에 축적된 자기 보호본능이 과잉 발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개념들을 망라할 만한 게 그 이름도 해괴한 이른바 ‘조직 논리’라는 것이다.[각주:3]그리고 이 때 적절하게 동원된 것은 ‘전체주의(파시즘)적 폭력’이다.
문학 집단 내부의 반응이 위와 같았다면, 그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집단의 반응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거참, 이름도 조폭스러운 소위 ‘서울대 패밀리’. 그 집단의 폭력적 패거리주의는 더이상 언급할 가치를 느낄 수조차 없다. 사실에 근거하여 냉철한 연구와 분석을 해낸 학자로서의 태도를 격려하고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중원의 온갖 고수들과 그들을 따르는 무리를 총동원해 사회적으로 생매장해 버리는 그들의 폭력 매커니즘은 뭐라 일러야 좋을까. 개떼식? 차마 견공들께 미안할 일이다. 두목의 양아치 시절을 입에 올린 행동대원을 ‘수술’해 버리는 조폭들의 논리와 그들의 폭력성이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벌써 9년이나 지난 일을 새삼 더듬으며 이런 앞뒤 없는 글을 쓰는 이유는 우연히 목도하게 된 2009년 2월 13일자 <서울신문> 문화란의 김윤식 교수 인터뷰 때문이다. 기사 말미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심기가 너무나 불편해져서 이런 식으로나마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며칠 동안 밥맛을 잃는 데 더해 불면증을 앓을 것 같아.
지금도 건재한 ‘산맥의 신화’는 한 번도 부정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2000년 초 한 대학원생(문학평론가 이명원)의 표절 의혹 제기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나마 분명히 남아 있다. 그 대학원생은 김윤식의 저서 ‘한국 근대소설사 연구’가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곳곳에 포진한 ‘김윤식의 아들들’은 분노했고, 미움을 산 장본인은 타의로 대학원 과정을 멈춰야 했다.
김윤식은 이에 대해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부정도, 긍정도, 어떤 해명도 하지 않고 있다. 산맥은 무결점이기에 산맥이 된 것이 아니다. 아름드리 나무뿐 아니라 잡목, 들풀, 잔돌까지 모두 아울렀기에 거대한 산맥이 될 수 있었다. 김윤식의 차기 저작을 다시 한 번 기대하는 이유다.(서울신문, <老평론가, 한국 현대문학 역사를 말하다─내가 살아온 한국 현대문학사> 일부)
그러나, 이렇게 거칠게나마 정리를 한답시고 했지만 며칠 동안 밥맛을 잃고 불면에 시달릴 것만 같은 기분은 영 떨칠 수가 없다.
참조 문헌
내부 고발자가 매장당하는 사회
내부 고발자의 ‘무모한 도전’을 지켜라
김윤식 교수 인터뷰
이명원의 대학원 자퇴이유서,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이승하 칼럼, 신경숙, 김윤식 표절 시비 유감
퍼슨웹 인터뷰, 문학평론가 이명원
[쟁점] 이명원-김윤식 사태에 대해
문화권력 비판-타는 혀, 이명원에게 사죄한다
문화권력, 어떻게 볼 것인가
[각주 1] 사실, 이런 논제의 토론을 위한 패널은 비판론자들로만 구성하는 게 옳다. 암인지 단순한 배앓이인지, 환부가 어디인지 얼마나 중한지는 의사들이 모여 의논할 일이다. 수술에 대한 환자와의 토론은 의사들의 진단과 토론이 끝난 후에 취할 절차이다.
[각주 2] 그 이전에도 김윤식 교수의 표절 시비는 끊이지 않았고 국문학도들에게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club_literature&no=338 참조
[각주 3] ‘조직논리’에 대해서는 다음에 쓸 포스트의 발아점인 ‘삼성전기 성희롱 사건’ 관련해서 다룰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하게 개념만 짚고 넘어간다. 뭐,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조폭 논리’, 딱 그거다.
비틀님 덕분에 여러 관련글들을 처음 읽어봅니다…
아직 전부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승하씨의 칼럼은 저로선 꽤나 충격적이네요.
제가 신경숙 사건은 전혀 알고 있지 못했던 터라….
아, 그리고 본문에 쓰신 ‘김현’과 관련한 ‘비판’이 있는 링크가 혹시라도 있는지요?
저 개인적으론 ‘김현’은 가장 좋아하는 평론가들 가운데 한 명이라서 말이죠…
특히나 관심이 가네요.
추.
삼성전기 성희롱 사건과 관련해서는 현재 고된 싸움을 하고 계신 짜스님(이은의씨)께서 무척 반가워할만한 글이겠네요.
좀 전에도 통화를 했는데요. 저로선 삼성전기 성희롱 사건은 장기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비틀님께서도 큰 힘을 보태주시길 바라봅니다…
‘사제 카르텔 논쟁’이 워낙에 김윤식(과 그 일파) vs 이명원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다구리)이어서 그런지 웹에도 김현 관련 문헌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아래와 같은 짧은 요약 글만 있더군요.
─김현
성실성은 높이 평가하나 특별한 자기 이론없이 프랑스 상징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기법
에 과도하게 경사되었으며 작품을 그자체로서 비평하기 보다 일개 매개물로 취급하여 자신의 생각을
펼 쳐가는 도구로 전락시킴. 또한 등단과 함께 문단내 자기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과도하게 50년대
작가와 비평가들을 평가절하 하고 나아가 한국근대 문학을 비하하였으며 다른 작가 또는 비평가들
과의 논쟁시 논점의 본질에 대한 주장을 펼치기 보다 애매모호하고 감상적
태도 일관함으로써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줌
(출처는 여기─『타는혀』 중 김현/김윤식 초간단 요약)
삼성전기 성희롱 사건에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글의 완성도를 떠나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으로 족하다는 심정입니다.
김현에 대한 지적은, 물론 위 짧은 “초간단 요약”만을 읽고 이야기하기도 좀 뻘쭘합니다만, 김종엽에 이명원을 비판하는 그 관점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김현의 비평을 굉장히 좋아하는 터라… 좀 심적으로 저항감이랄까.. 그런 것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요… (ㅎㅎ). 아무튼 좀더 구체적인 김현의 비평을 비판하는 텍스트를 읽었더라면 뭔가 흥미가 생길 것 같습니다만.. 위 이명원의 입장을 설명하신 “초간단 요약”를 통해 보자면, 그 비판행위 자체의 의미와 창조적인 살부의식(?)이랄까 이런 것은 평가할 수 있을지언정, “상징주의와 정신분석기법에 과도하게 경사”라거나, “감상적 태도로 일관” 등의 지적은 좀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네요…;;;;
아..글의 탄탄함이 느껴집니다. 절적하고 의미있는 언급이기라고도 생각하고요. 언어감각과 사색능력이 뛰어나십니다. 전 역시 그림그리기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답니다.
비판이라기보디는 질문이 있습니다.
‘카르텔’, ‘나와바리’라는 단어들은 저의 경우는 좀 받아들여 쓰기 어색한 말이거든요. ‘다구리’라는 말도 그렇고요. (물론 말씀하신 이명원-김윤식과 관련된 글들도 전부터 관심깊게 읽었었고요. 그래서그런지 ‘카르텔’이란 말은 좀더 익숙한 말이긴하지만요.) 아무래도 이런 단어들은 제겐 늘 소화안되는 불순물같이 느껴지걸랑요. 이거 그냥 개인적인 호불호에서 나온 느낌일뿐일까요? 아님 어떤 ‘가방끈’에 대한 열등감을 자극하거나, ‘동종업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소외감을 자극하거나, 뭐 그런 느낌은 없는걸까요?^^;
추.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댓글입니다.^^
추2. 김현에 대한 지적은 전 쫌 공감합니다.^^ 김현의 글은 하도 오래전에 읽고 좋아했던 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김현의 비평글들은 단지 그 자체로 하나의 글묶음(텍스트)이라는 의미 안에서만 재미있었걸랑요.
민노씨 / 특히 문학 비판은 ‘정답’이라는 게 없어서 받아들이는 이들의 문학관에 따라 견해가 참 여러 가지로 나뉩니다. 문학 전문가라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거의 정반대의 견해를 보이기도 하고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이명원의 [타는 혀]가 문학사적으로 꽤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고 여기는 이유는 지금까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엄청난 지위(=권력)를 누려 온 김현, 김윤식, 백낙청 등을 ‘건든’ 용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도 누군가 김현 식, 김윤식 식, 백낙청 식 틀을 어떤 식으로든 깨야 할 시기였고, 그렇게까지 못한다면 적어도 흔들어 놓기라도 했어야 할 시기에.. 사실 그보다 깊이 파고들면 저도 거의 무지합니다..^^;
누에 / 거의 졸필에 이런 찬사를…ㅠㅠ(그런데 제 짧은 생각이지만, 팀블로그에서 동인께 듣는 이런 노출된 찬사는 곱으로 낯뜨겁네요..^^;;;)
‘카르텔’은 누에님도 아시다시피 이미 그 사건을 지칭하는 말로 굳어져서 제가 함부로 뗼 수 없는…
‘나와바리’를 비롯한 속어 내지 비어 몇 개를 사용한 건 글이 너무 딱딱해지기에 역순화하기 위해… 좀 물렁한 글, 부족해 보이는 글이 읽기에도 따지기에도 편하지 않은가 싶어서요^^;;
1.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사례들을 주욱 모아서 한 곳에 정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잊지 않도록 말이지요. 저야 문학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지만, 링크해주신 글들도 함께 읽어보니 참 낯뜨겁군요.
2. 문학에 대해 전혀 몰라서 그러는데, 문학에서의 (법적) 표절 판단은 어떤 기준으로 하는 건가요? 음악은 첫 두 소절이 같다거나 음정은 다르더라도 박자 분할이 동일한 경우 (첫 부분이 아니라면 네 소절이 같거나 박자 분할이 동일한 경우) 법적으로 표절이라고 합니다. 악기 편성이 비슷하다거나 곡의 분위기가 같거나 멜로디가 같지는 않고 비슷하기만 한 정도면 대중의 비난은 받을 수 있을 지언정 법적인 표절에서는 피할 수 있겠죠. 문학도 분명 어떤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 검색해봐도 법적인 기준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_-;
음악의 경우도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이 머리 속에 남아 자기도 모르게 표절하는 경우도 있는데, 문학도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법적인 기준이 있다면야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판결은 날 것이고요. 단순한 문장들이야 사실 표절했다고 하는 게 넌센스일 것이고, 어떤 문학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혹은 창작이라고 할만한 문장이나 문단, 구성 등이 동일 혹은 유사해야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기준 또한 참 애매할 것 같고 말이죠.
문학 작품에서 표절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도 참 모호합니다. 그래서 문제 제기-반론-재반론 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곤 하지요(그러는 끝에 대개의 경우 흐지부지 끝나고 말지만 결국 소송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표절과 패러디의 한계를 명확히 하기도 어렵죠(하지만 패러디란 독자가 원본의 존재를 쉽게 알 수 있거나 알 수 있게 쓰는 것이므로 사실 별문제).
문학에서 표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요(물론 글 전체로 따져야죠),
1. 문장 도용
2. 글의 구조 도용
3. 글의 이미지(혹은 모티프) 도용
1은 말할 것도 없지만 2와 3은 무척 모호하죠. 링크해 둔 ‘이승하 칼럼’에도 쓰여 있는 것처럼 작가의 양심 문제나 독자의 판단 문제로 남기 쉽습니다. 제 생각에는 독자들이 어떤 작품에 대해 표절 의혹을 갖는 경우 작가는 그에 대한 적극적이고 성실한 해명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보는데, 신경숙 표절 논쟁처럼 문제 제기를 한 사람과 작가가 논쟁을 벌이다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끝내 논점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신경숙 표절논쟁은 문제 제기자의 주장이 옳습니다. 그런데 신경숙의 시장성 및 그녀(와 그 주변인들)의 문학권력과 이놈의 상업적 문학자본(이들은 또한 문학권력이기도)이 결탁해서는…ㅡ,.ㅡ;;
음악에 있어서는 그래도 표절에 대한 기준이 산뜻하군요…